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리 왕조 (문단 편집) ==== 에필로그 ==== 비록 기존의 기독교도 주민들이 갑질을 행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새로 정복된 이프리키야의 도시들은 루지에로에 의해 임명된 아랍인 총독들 하에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1152년 기오르기오스가 동로마 원정 중 사망하자 필리프가 후임 제독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무와히드 왕조가 [[베자이아]]를 점령하며 함마드 왕조를 멸하자 [[안나바]]의 태수가 시칠리아 왕국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필리프는 1153년 도시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팔레르모로 돌아온 필리프는 이슬람교도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다. 1153-54년 무렵 시칠리아 함대는 이집트 북부의 티니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프리키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복되지 않은 튀니스는 시칠리아에 곡물을 바치며 저자세로 나왔는데 비슷한 시기 [[루지에로 2세]]는 사망하였다. (1154년) 그를 계승한 [[굴리에모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침공과 교황과의 반목 때문에 아프리카 영토에 신경쓰지 못하였다. 1156년 교황과 베네벤토 조약을 체결하며 한숨을 돌린 시칠리아 왕국은 재차 티니스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의 동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슬람 지배로의 회귀를 원하는 봉기가 스팍스 등의 도시에서 일어났고 1158년 트리폴리가 무와히드 군에게 점령되었다. 아프리카 영토의 총독부가 위치한 마디야 역시 1159년 9월부터 포위되었다. 포위 도중 무와히드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은 진중에 있던 알 하산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강력한 요새지를 포기했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하산은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자가 곁에 별로 없었고 식량이 부족했으며 이는 운명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칼리파는 포위를 잠시 풀고 식량을 축적하였다. 그동안 스팍스가 항복하였고 가베스가 무력으로 점령되었다. 1158년에야 동로마와 화친을 맺은 시칠리아 왕국은 마디야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다. 1159년 160척의 함대로 [[이비자]] 섬을 습격한 피에트로 제독이 마디야에 접근했지만 제대로 된 전투 없이 철수하였다. 결국 1160년 1월 11일 마디야는 무와히드 군에게 함락되었다. 당시 마디야 일대는 무와히드 군대를 피해 모여든 기독교도들이 집결해 있었는데, 칼리파 알 무민은 시내의 비무슬림 주민들에게 이슬람 혹은 죽음의 선택지를 주었다. 이로써 시칠리아의 아프리카 영토는 소멸되었고 이프리키야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무와히드 광신자들의 분노 하에 소멸되었다. 그리고 마디야를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전가받은 해군 제독 마이오는 결국 그해 11월 반역을 꾀했다는 오명을 쓰고 암살당하였다. 한편 시칠리아 왕국과 무와히드 왕조는 시칠리아 함대가 무와히드 조의 공주가 타고 있던 선박을 나포한 후에야 협상을 하여 화친을 맺을 수 있었다. (1180년) 그리고 양국은 동쪽의 [[아이유브 왕조]] 견제를 위해 힘을 모았다. [[분류:12세기 멸망]][[분류:역사적 이슬람 국가]][[분류:모로코의 역사]][[분류:알제리의 역사]][[분류:튀니지의 역사]][[분류:리비아의 역사]][[분류:베르베르]][[분류:아프리카의 왕조]][[분류:모로코-알제리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